
아이키도를 처음 접하는 사람의 눈에는 무엇보다 두 사람의 움직임이 먼저 들어온다. 한 사람이 공격하고, 다른 사람은 그 안으로 들어가 힘을 흘리고, 이끌어 던진다. 그러니 아이키도를 신체 단련이나 호신술, 혹은 수많은 무술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이키도를 두고 종종 ‘예술’이라는 말을 쓴다. 왜일까?
아마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답은 기술에 있을 것이다. 음악가가 자유롭게 표현하기에 앞서 음과 음계, 화음과 문법을 배우듯, 아이키도를 수련하는 사람도 움직임과 거리, 타이밍과 방향을 익히는 데 오랜 시간을 들인다. 처음에는 관찰하고, 흉내 내고, 반복한다. 정해진 형태를 최대한 정확하게 재현하려 애쓴다. 오랫동안은 그것이 옳은 수련법이다.
그러나 문법을 완벽하게 안다고 해서 반드시 할 말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수없이 반복한 움직임은 세월이 흐르면서 단순히 수행해야 하는 과제에서 하나의 언어로 바뀌어 간다. 겉으로는 같은 기술을 펼치더라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몸과 나이, 경험과 감수성이 다르고, 무엇보다 상대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두 피아니스트가 같은 악보를 연주해도 똑같은 음악을 들려주지 않는 것과 같다.
기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어느 순간 눈에 잘 띄지 않게 된다. 몸 안에 완전히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예술적 경험의 깊은 곳에 자리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름다움이다.
아이키도의 어떤 움직임은 그저 아름답게 느껴진다. 왜 그런지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반드시 화려하거나 곡예에 가까운 동작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순간에 더 깊이 감동할 때가 많다. 단순하면서도 본질적인 움직임, 그 순간만큼은 시간과 움직임과 의도가 정확히 있어야 할 자리에 놓인 듯한 움직임이다.
불과 한순간 전까지 맞서 있던 두 사람이 문득 하나의 형태를 함께 이루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것은 특별한 아름다움이다.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아이키도가 시(詩)의 성격을 띠기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내가 생각하는 시는 아름다운 말을 늘어놓는 일이 아니다. 그 말을 통해 누군가의 내면에서 무언가를 움직이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몸의 움직임도 시가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몸은 단호함과 섬세함, 힘과 가벼움, 불안과 평온을 전할 수 있다. 보는 사람이 기술의 이름을 모르고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우리는 화성의 원리를 몰라도 음악에 감동한다. 마찬가지로 아이키도를 모르더라도 두 사람의 만남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만남에는 내가 예술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소통이다.
아이키도에서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긴 대화를 나눈다. 한 사람이 무언가를 건네면 다른 사람이 받아들이고, 한쪽이 변하면 다른 쪽도 그에 응답한다. 압력과 방향의 변화, 갑자기 좁아지는 거리 같은 것들이 목소리를 거치지 않고 몸으로 전달되는 말이 된다.
따라서 행동에 앞서 지각이 있고, 내가 무엇을 느끼느냐에 따라 이어지는 행동도 달라진다.
이는 아이키도에서 벌어질 일을 혼자서 완전히 결정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만들려는 움직임의 일부는 필연적으로 상대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이키도는 이미 완성된 작품보다는 음악의 즉흥연주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나는 문법을 알고 내 악기를 다룰 줄 알지만, 동시에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일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나는 서로 다른 것들을 이어 본다.
나의 움직임과 상대의 움직임을, 나의 의도와 상대의 의도를, 단단함과 부드러움을, 채움과 비움을 연결한다. 어느 한쪽을 지우고 다른 한쪽을 앞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 한순간이라도 그 둘을 함께 담아낼 수 있는 형태를 찾기 위해서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가 무술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갈등이다.
아이키도의 뿌리는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무술에 있다. 그 안에는 여전히 공격과 방어, 위험과 거리,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순간이 남아 있다. 그런데도 아이키도는 조금은 역설적으로 ‘평화의 무도’라고 불려 왔다.
아름다운 표현이다. 하지만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공허한 수사에 머물고 말 것이다.
아이키도가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일 수 없다. 갈등이 없다면 변화시킬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이키도는 이미 균형이 무너진 순간부터 시작된다. 누군가가 붙잡거나 때리고, 공간을 침범하거나 힘을 가한다. 대립하려는 의지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아이키도의 출발점은 조화가 아니다. 대개는 조화가 깨진 바로 그 순간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평화의 무도’라는 말은 겉보기만큼 순진한 표현이 아닐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평화는 갈등이 사라진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갈등이 이미 벌어진 순간, 바로 그 안에서 찾아가야 할 방향에 가깝다. 대립적이고 때로는 불행하기까지 한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아, 가능하다면 그 흐름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려는 시도다.
상대가 민다고 해서 반드시 더 강하게 밀어붙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내 공간을 침범한다고 해서 나 역시 더 공격적으로 변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상대가 충돌을 원하더라도 나는 그 힘과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수동적으로 물러나거나 상대에게 순응한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키도는 분명한 존재감을 요구한다. 공간을 차지하며 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필요하다면 단호하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변화시킨다는 것은 공격이 없는 척 외면하는 일이 아니다. 공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되, 그것을 반드시 같은 모습으로 돌려줄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아이키도의 가장 매력적인 점도 여기에 있다.
갈등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갈등이 향하는 곳을 바꾸려 한다는 것.
대립에서 관계가 태어날 수 있고, 충돌 속에서도 만남과 화해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물론 언제나 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 점은 분명히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키도는 모든 공격을 평화롭게 봉합할 수 있다거나, 모든 갈등은 결국 포옹으로 끝나야 한다는 순진한 약속이 되고 만다. 안타깝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자신을 보호해야 할 때가 있고, 상대의 행동을 멈춰야 할 때가 있다. 거리를 만들거나 누군가가 더는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 상황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순간에도 아이키도와 맞닿아 있는 질문 하나는 남는다.
이미 존재하는 갈등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갈등을 더해야 하는가?
이 질문을 통해 ‘평화의 무도’라는 말은 비로소 공허한 수사에서 벗어난다. 평화는 우리가 언제나 출발하는 지점이 아니라, 지금 벌어지는 일을 이끌어 가려는 방향일 수 있다. 늘 그곳에 도달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갈등을 키우는 것만이 유일한 대응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수 있다.
여기서 ‘예술’이라는 말은 다시 돌아와 이전과는 다른 빛을 띤다.
예술은 흔히 변화와 관계를 맺는다. 음악가는 침묵을 소리로 바꾸고, 시인은 평범한 말을 감동으로 바꾸며, 화가는 물질과 빛과 색을 이미지로 바꾼다.
아이키도는 조금 특별한 재료를 다룬다.
갈등에 놓인 인간관계다.
그것이 아이키도가 받아들이는 원재료이며, 아이키도는 바로 그 위에서 작업한다.
무질서 속으로 들어가되 굳이 더 큰 무질서를 만들지 않는다. 힘을 통과하면서도 그것을 부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상대를 파괴하는 것을 승리의 유일한 모습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오랜 시간 수련하다 보면 예술적 성숙과 무척 닮은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조금씩 덜어 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힘에 대한 집착이 줄어들고, 불필요한 동작이 사라지며, 자신을 드러내려는 마음도 옅어진다. 때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기술마저 줄어든다. 젊은 시절에는 부족함으로 여겼을 법한 것이 어느 순간 이상하리만큼 풍요롭게 느껴진다. 예술이 흔히 그렇듯, 어느 때부터는 과한 것보다 본질적인 것이 더 큰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왜 아이키도를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단지 정교한 기술을 지니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기술이 하나의 언어가 되고, 몸을 통해 느끼고 듣고 해석하는 법을 배우며, 두 사람의 만남 속에서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무언가가 태어날 때 아이키도는 예술이 된다. 하나의 움직임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내면뿐 아니라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움직일 때, 아이키도는 비로소 예술이 된다.
무엇보다 대립에서 시작된 것이 불과 한순간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무언가로 바뀔 수 있을 때.
나는 이것이 아이키도를 ‘평화의 무도’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깊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갈등을 모두 없앨 수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 아니다. 갈등의 한가운데에서도 변화의 가능성을 찾도록 우리를 길들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 지금 있는 것을 받아들여, 앞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을 잠시나마 보여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원문 – 로마 카신 도장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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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카신 도장은 로베르토 마르투치 선생이 지도하고, 엔도 세이시로 선생님 계열의 도장입니다.
아이키도뿐 아니라 요가와 태극권 등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이키도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렇게 명확히, 한문장 한문장 가슴에 와닿는 글은 처음이네요. 특히 아이키도의 “평화의 무도”개념이 순진하지 않다는 대목, 깊이 와닿았습니다.
훌륭한 글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